민주로, 내일로. 2일차 [김남주 시인 생가]

김제에서 아리랑 문학관을 보고 떠나 첫날 숙박장소인 경수 외할머니댁에 가기 위해 목포로 향했다. 모두 지쳤는지 기차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여행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창밖을 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게 아닐까.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가운데 새로운 모티브를 얻을 수도 있

목포에 도착하자 경수의 외삼촌과 외숙모가 차를 끌고 마중을 나와주셔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기차에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에 택시에 비하면...아...햄볶아요ㅋㅋ)

 

 

 

(기억나는가. 한창 강남스타일 동영상을 찍자는 우리에게 할머니는 '그랜마덜 너~!!/그게바로 너~!!' )

 

 

 

목포에서 해남으로 이동. 두호는 이제 한 달후에 군대를 가기 때문에

목포에 있는 외갓집 인사드리러 잠깐 가서 우리는 해남에서 만나기로 했다.

동선, 회언, 경수는 할머니댁에서 15분 거리라는 버스터미널로 향하는데.

회언이 똥 땜에 차를 놓쳤다.

 

다음 차를 타고 해남에 갔으나 김남주 시인 생가로 가는 버스가 없었고

덕분에(회언이 똥 때문에, 이 똥은 마치 권선생님의 강아지 똥처럼 훗날 우리에게 동심을 이끌어 줄 것이다.) 

일정 다틀어지고 김남주 시인 생가는 내일로 미룸.

 

산 꼭대기에 있는 두륜산 유스호스텔 도착 ! 오늘 잠은 여기로 정했뙇!

 

 

 

 

 

 

(폭풍 유희왕 중인 우리들. 이번 여행의 제 2의 테마는 유희왕이였다.

역시 유희를 즐길 줄 아는 우리 날라리 보이즈. 회언이 신보라 귀요미 표정 따라하기 병맛 샷 >_<)

 

 

 

 

(기억나니.ㅋㅋ 비오는 데 버스 놓친다고 막 뛰던 그 때. 이번 여행에서 보기 드물게 두호가 앞장을 섰지. 하지만 우리는 역시 버스를 놓쳤다. ㅋㅋㅋㅋㅋㅋ)

 

 

 

 

 

(버스를 기다리며 간단한 조식. 이렇게 어긋난 계획도 여행의 한 부분이라고 누가 말했지. 이 말로 참 우리 합리화 많이 했던 듯 ㅋㅋㅋ)

 

( 이 날 일찍 일어나 호스텔 컴퓨터로 동선은 수강신청 올킬 ~ 굳)

 

그리고 김남주 시인 생가 드디어 도착 !

 김남주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가?

 

 

(전라남도 해남,1946 ~ 1994)

혁명과 투쟁의 시인. 김남주

살아 있을 때 "어어, 나는 시인이라기 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즐겨 말했던 시인. 피, 칼, 학살, 전사, 비명, 피 투성이, 등 강렬한 언어로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내던 시인 김남주가 걸어간 길은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이다.~

저 먼 나라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사랑했던 김남주는 감옥을 전전하며 병마와 싸우다가 혁명과 투쟁의 시들만 남기고 49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뜬다.  ~

그는 대학에서 3선 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이끈다. ~

유신 헌법에 맞서 나라 안에서는 처음으로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해 배포한다. ~

1973년에는 <함성>의 뒤를 잇는 <고발>을 제작하다가 체포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

~ 김남주는 광주로 올라와 사회과학 서점 '카프카'를 개설한다. 이 곳에서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한 외국 식민지 혁명가들 체 게바라, 호치민 등을 연구하며 그들이 걸어간 형극의 길을 되새겼다. ~

~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다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84년 첫 시집 <진혼가>를 출판하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우유팩에 날카롭게 간 칫솔대로 눌러 써서 지은 시와 산문을 면회객들을 통해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낸 것들이었다. ~

잿더미 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 꽃이여 피여/ 피여 꽃이여/ 꽃속에 피가 흐른다/ 핏속에 꽃이 보인다/ 꽃속에 육신이 보인다/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그것이다!

눈으로 쭉 읽는데 시인의 결연하지만 절제하는 마음이 확 느껴졌다. 마치 황소가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앞 발로 땅을 파는 것과 같은. 칼을 가는 마음, 뜨거운 그 마음이 느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위키 백과 참고)

 

 

 

 

 

( 죄송하단 말밖엔. ... ㅠㅠㅋㅋㅋㅋㅋ; )

 

 

 

 

 

 

(김남주 선생님이 계셨던 0.75평 독방을 구현해 놓은 장소가 있었다.

다리 펼 수 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9년 여 간 감옥살이를 하신 것이다. 

밥 넣어주는 구멍을 통해 사진을 찍었다.)

 

 

 

 

 

( 김남주 선생님. 그 분은 무엇을 위해 그러한 삶을 사셨을까 )

 

 

 

 

 

 

 

( 열심히 강남스타일 춤을 따라 추는 우리들. 이걸로 UCC 찍어 정리하고 싶었지만 중도 포기. ㅠㅠ 이거 말고

동영상 찍은 거 있는데 그거 보고 싶다고 !!! 왜 재생이 안되는 걸까. NG버전 보면 빵빵 터질 텐데. )

 

 

 

 

 

 

(이번에 또 하나 유용하게 쓰인게 바로 '폰 타이머'이다.

삼각대가 없어서 이렇게 벽에 세워두고 타이머에 맞춰 우리 사진을 찍었다.)

 

 

 

 

(수감 중 우유팩에 썼던 글들을 이렇게 흙판으로 재연하여 전시해놓았다. 인상적이였던 글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라 저 의문문에 바로 'yes'를 할 수 없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하신 그 분을 보며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설정 샷 한 컷. 찰칵. 이 역시 타이머, 점프샷 같은 것도 찍을 걸 그랬다.)

 

민주로, 내일로. 1일차 [아리랑 문학관]

 

 

 

날라리 보이즈 답사 첫날! 모두들 기대되는 마음으로 영등포역에 모였습니다. 

 열차안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준 물품들을 서로 나누고 모자도 써보면서

그리고 엽사도 찍으면서.......... 그러면서 놀았습니다 ㅋㅋㅋㅋ 

시간은 금세 갔고  김제에 도착했습니다.

 

 

 

 

 

 

원래는 버스를 타고 아리랑 문학관을 방문할...계획이었으나!! ㅠㅠ

무려 버스가 한시간 뒤 도착이라 택시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요금은 대략 8000원. 4인 버스 비용보다 3000원 비싸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도착한 아리랑 문학관~

 

 

 

 

 

 

줄거리를 읽고 있는 동선이. 친구들 다 읽을 동안 혼자 까톡까톡 하다가 뒤늦게 읽기 시작함 - _-

어쨌든 1층부터 2층까지 그리 크지 않은 아리랑 문학관의 전시관을 둘러봅니다.

 

 

 

 

 

 

 

 

아리랑 문학관에서 느낀 것을 불러달라하니 배경수 군은 이렇게 보내줬어요... ㅋㅋㅋㅋㅋㅋ비장한 남자 배경수 ↓

 

아리랑 문학관은 나와 조정래 작가님의 첫 매개체 일것이다. 사실상 태백산맥, 아리랑 등으로 매우 유명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그 책들을 직접 읽어보지도 못했고 그냥 마냥 아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아리랑 문학관은 대단히 놀라웠다. 처음에는 ‘문학관에 뭐 별거 있겠어..’ 싶었는데, 그곳에는 조정래 작가님의 모든 것이 있었다. 아리랑이라는 작품 하나를 쓰기위한 사전조사들. 창씨 개명을 더욱더 사실적으로 쓰기 위해 일본식 이름에 대한 연구. 역사연구. 지리연구등 정말 방대한 양들의 자료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글감옥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 만큼의 열정이 보였다. 왜 그렇게 글을 쓰시는 지에 대해서도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소설이나 시를 쓰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대단히 부끄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이정도의 노력과 열정이 있어야 오랫동안 사랑받는 글을 남기는구나. 이게 작가라는 사람이구나. 정말 자신의 글에 혼신의 힘을 바친 사람이구나. 문학관이 설립될만하구나. 나는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계속해서 문학관을 관람했다. 그러던 중 이런 글을 발견했다. "36년 동안 죽어간 민족의 수가 400만! 2백자 원고지 18000매를 쓴다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고작 300여만자!" ...저 유리벽에는 저 말을 포함해 조정래 선생님의 인생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한 사람의 생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경수는 아리랑 문학관을 다녀온 후 자아 비판의 시간을 보냈네요 :)

어쨌든 정말 이 문구는 저에게도 참 인상깊었어요.

 

 

 

 

 

 

민족 최대의 고난이었던 일제강점기, 그 어둡고 힘들었던 시대를 그려내기 위한

작가의 열정에 이렇게 감탄하면서 아리랑 문학관 관람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아리랑 문학관에서 매우 가까운 벽골제에서 잠시 놀았어요.

벽골제는 입장료가 무료인데다가 잔디가 많아 놀기 참 좋더라구요 ㅋㅋ

 

 

 

 

 

열심히 논 후에는 버스를 타고 김제 시내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목포로 내려갔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해남 김남주 생가입니다!!!

 

 

 

민주로, 내일로. 3일차 [태백산맥 문학관]

(태백산맥은 조정래 작가님이 쓰신 10권으로 구성된 대하 소설이다.)

해남 김남주 시인 생가 답사를 마치고 왔던 길로 돌아갔습니다. 답사를 가는 길은 오래 걸리는데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얼마 안 걸린 것같은 심리. 개운함일까요? 성취감일까요? 아니면 각자 그 곳에서 느꼈던 것을 이야기 하면서 걷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버스 타러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였습니다. 생가에서 10 여 분을 내려와 버스를 탔습니다.

 

( 슬슬 지쳐갈 여행 3일 째, 아 지친다 ~. 카메라를 들이 미니 조용하게 폼을 잡는 두호와 시크 동선 그리고 쩍벌남 경수 )

 버스 가격은 1050원이였다. 해남 터미널로 돌아와서 벌교로 이동! 버스는 9800원 ~

벌교 터미널 도착 ! 우와 왕년에 터미널이 꽤 큰 걸 보면 벌교가 꽤나 컸던 도시였나보다. 적어도 30년은 되보이는 듯한 건물.

 

 

이번 여행 가장 큰 도움이 됬던 앱인 '네이버 지도'앱을 이용 ! 태백산맥 문학관을 찾아러 출발. 그런데 알고보니 바로 옆으로 가면 길이 나오는데 우린 한 바퀴를 돌았다.ㅋㅋㅋㅋㅋ

( 또 하나 유익했던 앱은 네이버 윙스푼. 각 지역의 맛집을 알려 줬던 앱. 개인적으로 별 4/5 )

 

 

입구에는 이렇게 큰 표지판이 있다. 5분 쯤 오르막 길을 올랐을까. 기하학적으로 생각 세련된 건물 발견!

 

건축가 김원 선생님이 설계하신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을 건축으로 말하다'

~ 소설이 그려낸 분단의 아픔은 산의 등줄기를 잘라내는 아픔과 비견될 것이었다. 건축가가 산자락을 잘라내는 행동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건물은 우리의 그 아픈 이야기가 묻혀있던 땅 속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등줄기가 잘라지는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했다.~

~건물은 한 발 물러선 듯, 멀리서 보면 그저 언덕에 유리탑 하나가 서 있어서 밤에는 지하의 억울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듯한 탑이 하나 보였으면 했다.~

~건물 안에 무엇을 많이 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태백산맥 관련해서 수많은 평가와 연관작업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두고두고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갈 수 있도록, 즉 '되어진'것이 아니라'되어가는'개념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입구 바로 왼쪽 동판 위에 쓰여있던 건축가 김원 선생님의 글 중. 사진은 태백산맥 문학관 홈페이지)

 

 

 

입장료 대인 2000원. 2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 6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태백산맥의 집필과정, 태백산맥 이외의 근현대사를 다룬 다른 소설 소개, 영화 태백산맥, 이적성 시비와 논란, 세계인의 소설 태백산맥 등. 넓은 전시장소에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건축가 김원선생님의 말씀대로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 진행형의 느낌을 받은 전시 구성이였다.

 

 

 

그리고 문학관 옆에는 원형상 선생님의 백두대간의 염원이라는 높이 8m, 길이 81m 인 거대 벽화가 있다. 세계 최대, 최초의 야외건식 '옹석벽화'라는데 이를 위해 지리산부터 백두산까지 4만여 개의 자연석 몽돌을 채집하셨다고 한다.

 

 

 

 

동선이는 소설이 보안법 위반이라는 고소가 11년이나 이어지다가 무협의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들과 관련 자료들을 보며 두호의 말처럼 ‘한국 민주주의가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고 느꼈단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들어왔던 위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조정래 작가님은 문학관이 세워 졌을 만큼 위인으로 불린다. 업적에 대한 호평.
작가님은 10년 간 태백산맥이라는 글을 쓰시면서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긴 세월, 중년의 시절을
보내셨을까. 왜?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많은 위인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일을 했는가.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는가. 내가 내린 결정은 이런 것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이다. 후세에
익명의 그 한 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 움직인다. 원동력이 될 지 모르는 말인데 사실 겸손해야
이런 대작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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